저자 : 피천득
출판사 : 샘터
예전을 추억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의 생애가 찬란하였다고 하더라도 감추어둔 보물의 세목(細目)과 장소를 잊어버린 사람과 같다. 그리고 기계와 같이 하루하루를 살아온 사람은 그가 팔순을 살았다 하더라도 단명한 사람이다. 요즘 참 사람 인연이란 알 수 없다고 많이 느끼는 중입니다. 전혀 그런 티를 분위기를 못 느꼈는데 날 미워하던 사람이 있었다던가, 친해지기 힘든 타입이라고 생각했는데 꾸준히 옆에 있어주는 사람이라던가, 잊혀졌다고 생각했는데 어느날 갑자기 연락이 온다던가, 8년 전 채팅에서 만난 사람과 몇 마디 안 나눠보고 '우리 앞으로 애인사이 할까?' 이러면서 아주 아무 생각없이 만났다가 결혼을 해버렸다던가............ 일주일에 걸친 냉전도 방금 전에 정말 딱 만 일주일만에 종전됐기에 답답했던 마음이 다 풀려서 이제야 겨우 이 인연의 리뷰를 씁니다.
사실... 부끄럽지만, 인연을 읽었는 줄 알았는데, 읽고보니 안 읽었더라구요. 아하하. 의외로 피천득 선생님의 수필을 읽어본 적이 거의 없다는 사실에 조금 놀랬습니다. 아니, 어쩌면 국어시간에 읽었던 것도 그다지 감흥이 없어서 잊어버리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읽었다는 걸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은 달랑 하나 '은전 한 닢'이었어요. 그러나 지금 이 책을 다 읽고 난 뒤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역시 '인연'이네요.
얼마 전에 친구들이랑 사주카페란 곳에 가봤습니다. 두어달 새 두 번을 가게 되었는데 거기서 두 번 다, '작년은 결혼할 인연이 아니었고 오히려 이별수가 있던 해였다' 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저로서도 뭐 사실 좋아라 하며 한 결혼이 아니었고, 결혼한 지 이제 8달 됐는데 그 사이 이혼이라는 말이 알게 모르게 언급된 것만으로도 수십번이 넘습니다. 그래도 꾹꾹 참고, 이 사람과 결혼했으니 평생을 같이 살 연이다, 라고 생각하고 버텨오고 있었거든요. 그리고 그 다음 주에 이 책을 다 읽게 되었습니다.
피천득 선생은 아사코와 결국 두 번의 좋은 기억, 그리고 세 번째의 안 좋은 기억으로 씁쓸한 인연으로 남게 되었지만 인연이란 그런 건가 봅니다. 그 세 번째 만남이 없었더라면 인연이라는 글은 씌여지지 않았을 거고, 피천득 선생의 대표작은 바뀌었을 것이며 이 책의 제목이 인연이 되지도 않았겠죠. 모 작품에서 나오는 말마따나 세상 모든 것은 다 필연에 의해 돌아가듯 피천득 선생과 아사코도 그러한 인연이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아무리 결혼할 수가 아니었어도 지금의 신랑과 전쟁과 냉전과 종전을 거듭하며 사는 것 처럼요.
인연에 대한 이야기는 이 정도로 하고, 사실 이 수필집을 읽으면서 더 뜨악했던 것은, 아니 뜨악은 좀 표현이 안 좋은지도 모르겠네요. 다른 말로 표현하면 너무 진부한 표현이긴 하지만, 피천득 선생은 영원한 소년,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 이런 식으로밖에 얘기할 수가 없겠네요. 나쁘게 말하자면 '순수해서 이기적인 어린 아이' 정도. 누구나 가식적으로는 그렇게 살 수 있지만 피천득 선생님의 글에서는 그것이 전혀 가식이라고 느낄 수가 없습니다. 장미 일곱 송이를 샀는데 오다가 사람들에게 다 나누어.. 주었는데 나중에 다 주고 나니 왠지 장미 한 송이라도 가져서는 안 되는 것 같아서 서운하다고 쓴다던가 하는 식으로 정말 그 순간 느낀 감정을 포장없이 썼다는 느낌이 너무 신선했습니다. 이렇게 '포장없는' 글을 읽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로는 충격이었습니다.
그러한 면이 더 잘 드러났다고 느끼는 글이 '선물'과 '난영이'입니다. 내가 가난해서인지 셔츠나 양말도 선물해주는 사람이 있는데 그런 것도 좋기는 하지만 나는 가벼운 사치로도 보이는 선물이 더 좋다, 금액이 문제가 아니라 그 순간의 기쁨과 이후의 기쁨을 느끼게 해줄 수 있는 것들.. 주는 사람도 기쁘고 받는 사람도 기쁘게 하는 것, 그것이 선물이 아닐까
(이라고 쓰지는 않았지만 ^-^; 단지 제 해석입니다.) 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요즘은 선물이라는 것이 참 너무 가벼운 의미로 횡행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진정한 '선물'은 없다고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생일선물, 입학선물, 졸업선물, 결혼선물 등등 너무도 기획적이고 획일적일 정도로 각종 웹사이트에선 요즘 최고의 인기 선물 품목을 광고하고, 사람들은 그것을 선물로 고르고, 받는 사람은 당연하게 좋아합니다. 부모님용 선물, 자식용 선물, 애인용 선물, 친구용 선물.. 언제부터 이렇게 선물이라는 것이 '정해져 있어서 당연히 주고받는' 것이 되었을까요. 아니, 처음에 선물을 보고 쓰려던 내용은 이게 아니었는데... 어째 이쪽 방향으로 흘렀군요. 뭐 이런 고민도 하긴 했었습니다만, 어쨌든 선물이라는 글을 보고 느낀 것은 피천득 선생님이 글을 사람들이 '읽는다'라는 것을 의식했는지 안했는지 어쨌든 가식없이 쓴다는 것을 느꼈다는 것이었습니다. 아, 그리고 '난영이'. 제목은 '서영이와 난영이' 이지만, 얼마 전에 피천득 선생님에 관한 자료를 찾아보다가 선생님이 '난영이'를 안고 있는 사진을 발견했습니다.

백 살 다 된 할배가 인형을 자식처럼 소중히 안고 얼르고 씻기고 챙겨준다는 것이 누가보면 참 노망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笑) 사람은 일생 살아온 길이 얼굴에 나타난다고 하지요. 글에서도 그 한결같고 순수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는데 직접 사진을 보니 그 인자함과 애정이 막 광채가 나는 듯 하네요. 이러한 사람을 만났어야 하는데 말이지요!!!!! 근데 저희 신랑은.... 흑.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좀 안타까운 것이 수필집 내내 부인과 다른 두 아들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애정이 딸에게만 집중되어 있는 것 같다는 생각도 좀 듭니다. 거기다 두 아들 중 한 아들은 아예 한 번도 언급이 없고, 다른 한 아들은 마지막 즈음에 가서 의학 공부를 하는 아이라고 살짝 나올 정도입니다. 전 피천득 선생님 슬하에 자제는 딸 하나뿐인 줄 알았다가 조금 놀랬습니다. 그런 것을 보면 순수한 것도 다른 의미에서는 독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이 인연을 읽으면서.. 그동안 제가 책에다 그런 짓(!)을 저지른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바깥에서 이동시간에 읽다보니 어쩔 수 없이 인상 깊은 구절, 다시 보고 싶은 부분을 그 페이지를 접고야 말았습니다. 처음엔 살짝 끄트머리를 접었는데 워낙 많은 부분을 접어서인지 책 오른쪽 아래가 퉁퉁 부어버렸습니다.. 흑흑.
마음에 드는 구절을 고르는 건 너무 어려우니 한 마디만 하고 싶네요.
'나는 양복 호주머니에 내 용돈이 7백 원만 있으면 세상에 부러운 사람이 없다' <-이거 대체 몇 년도인가요.. ㅠ_ㅠ 저도 제발 700원으로 행복해하고 싶어요.. ㅠ_ㅠ
사실 정말 인연을 읽으면서 가장 많이 느낀 건....... 정말 우리나라 물가 많이 올랐다, 였습니다... ㅠ_ㅠ 이 분 작년에 돌아가셨는데.. 어째서 한 백년 전 사람이라고 생각되는 거야... 엉엉.. (아니 정확히는 98세에 돌아가시긴 했지만요........)
클래식을 사랑하고 문학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고 일생을 순수하게 살다 돌아가신 어린아이 같은 영혼, 이제는 하느님 곁에서 천사 날개 달고 천국의 글을 쓰고 계시겠지요... :)